웨슬리안타임즈 기사 원본: https://www.kmcdaily.com/news/articleView.html?idxno=10489
임신한 아펜젤러부부가 머물던 인천, 감리교 선교의 모태지로
소요한 교수, 이은선 교수 발제로 140년 전 선교의 의미 되짚어


혼돈과 궁핍의 조선에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복음의 첫발을 디딘 선교 140주년을 맞이하여 인천광역시총연합회와 기독교선교문화연구회가 주최하고 인천기독교역사문화연구원이 주관한 기독교 선교 140주년 기념 예배 및 심포지엄이 2025년 4월 1일 만수중앙감리교회에서 3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열렸다. 선교 140주년을 맞이하여 역사적 의미를 되돌아 보고, 앞으로 나가야 할 바를 모색하는 의미 깊은 자리였다. 두 명의 발제자 중 소요한 교수(감리교신학대학교 교회사)가 ‘초기 내한 선교사들의 선교 사상과 그 특징’의 제목으로 발제했고, 이은선 교수(안양대 명예교수/백석대 초빙교수)가 ‘한국 선교 140주년과 해방 이전 인천 기독교의 역사적 의미’의 제목으로 발제했다.
1부 기념 예배와 2부 심포지엄의 순서로 이날 행사가 진행됐다.

대회사를 맡은 정일량 목사(인천기독교총연합회 총회장/향기로운교회)는 대회사에서 1882년 대원군 파와 민비 파의 피비린내 나는 파벌 싸움인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으로 한국을 둘러싼 청국과 일본의 대립 속에서 혼란과 궁핍의 도탄에 빠진 이 민족을 구원하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와 언더우드 선교산는 서슴없이 순종했다고 했다. 아펜젤러 부인은 임신 상태였고, 언더우드는 고생하기 싫은 약혼녀와 파혼하고 총각의 몸으로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했는데, 이들 앞에 우리는 빚진 자라고 정일량 목사는 밝혔다. 정일량 목사는 이들 선교사가 첫 발을 디딘 이곳 인천이 교파를 초월하여 성시화 되도록 뜻과 힘을 모으며, 또한 청년들을 민족 지도자로 세워서 이 나라와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역이 되기를 소망하며 선교 140주년의 다짐을 한다고 했다.

환영사에 나선 황규호 목사(기독교선교문화연구회 이사장/인천기독교회관/만수중앙감리교회)는 환영사에서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오후에 이역만리 미지의 땅 인천 제물포항에 두 명의 선교사, 헨리 G 아펜젤러(1858-1902)와 호러스 G 언더우드 (1859-1916) 선교사가 복음의 씨를 뿌리기 위해 찾아왔다고 했다. 이들은 각각 미국 북감리교회와 북장로교회 출신으로 오늘날 한국 감리교회와 장로교회의 효시가 되었다. 한국교회가 오늘날과 같이 세계적인 교회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초기 선교사들의 복음에 대한 열정과 섬김, 희생적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두 분의 선교사가 단순한 교회 개척을 넘어 교육과 의료, 사회개혁을 통해 이 땅이 하나님의 나라로 세워지길 꿈꿨던 것처럼, 이분들이 가졌던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 우리에게 도전이 되고 새로운 좌표로 재설정되는 영적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하면서 교계의 연합과 일치를 위해 불철주야 수고하시는 총회장 정일량 목사와 임원진 모든 분께 감사하며 환영사를 마쳤다.

설교를 맡은 송기성 목사(정동제일교회 원로)는 ‘내가 달려가 길을 마치기까지(사도행전 20:22-24)’의 제목으로 세 가지를 설교했다. △첫째, 성령에 매여야 한다. 한국교회와 세계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에서 표류한 지 한참 오래되어 점점 타협과 타락, 무기력으로 치닫고 있다고 짐 삼발라 목사의 경고를 인용했다. 초기 선교가 신통치 않았던 토마스 하디 선교사가 더럽고 냄새라는 조선 사람이라고 무시했던 오만과 교만을 깨뜨리고 회개하고서 하나님의 큰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 난 것처럼 우리도 회개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목회의 새로운 기법과 기술이 아니고 엎드려 기도하고 회개하면 부어주시는 성령의 능력이라고 했다.

△둘째, 고난을 감수해야 한다. 바울은 성령께서 하신 말씀, 가는 곳마다 각 성에서 결박과 환란이 나를 기다린다는 말씀에 고난을 피하지 않았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안식년을 맞이해 미국에 갔을 때 그의 초췌한 모습을 본 대학 동창 목사들이 조선에 가지 말고 필라델피아 연회에서 함께 목회하자고 권면했다. 그때 아펜젤러는 일언지하에 거절하며 “나는 나를 더 필요로 하는 조선을 위하여 이미 내 목숨을 내주었다. 나는 미국이 아니라 조선에서 천국에 갈 거야!” 라고 했는데, 그리고 6개월 후 1902년 6월 12일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 번역 위원회 모임을 가다가 선박 충돌 침몰 사고로 순직, 소천하셨다. △셋째, 사명에 충성하며 달려가야 한다. 언더우드는 1912년 제4차 안식년 휴가를 맞아서 미국에 갔을 때 그의 형 존 언더우드가 27년 동안 한국에서 선교사역을 할 만큼 했으니 이제 함께 편히 살자고 했다. 더구나 이때 연합 기독대학 설립을 하려는데 선교회의 반대와 함께 건강도 악화되었다. 그러나 선교지 한국으로의 귀국은 고난의 길이지만 돌아와서 1913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이 되었고, 1915년 형 존 언더우드의 5만 불 후원금으로 신촌에 19,320평의 용지를 사서 대학을 개교하고, 이듬해 소천했다. 선교 140주년을 맞이하여 바울처럼 성령에 매여 고난에 뚫으며 달려갈 길을 달린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를 우리의 따라야 할 본으로 삼자며 은혜를 나누었다.

고석현 목사(기독교선교문화연구회 이사/간석제일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이 뿌려진 이 나라가 성장하고 부흥해서 이제 제2의 선교국이 되게 해 주셨으니, 받은바 선교의 사명을 잘 나누는 한국 교회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다.

축사에 맡은 전양철 목사(인기총 증경총회장/전동교회 원로)는 예수 그리스도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만물을 섭리하시며 인간의 생사 화목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셔서, 믿는 자의 생명과 길이 되시고, 영생을 얻게 하시고 매일 올바르고 진실되게 살게 하시는 분이라고 했다. 이 예수를 믿고 알리는 일을 우리가 오늘까지 140년 동안 해왔다는 것은 인간사 최고 최대의 사건이고 업적이며 축하할 일이라며 축사했다.

격려사에 맡은 이건영 목사(인기총 증경총회장/제2교회 원로)는 지난 1월 부흥회 인도차 버지니아 한인교회에 갔다가 아펜젤러 파송교회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고 했다. 아주 작은 도시였다. 140년 전에는 얼마나 작은 교회였을까? 하는 생각에 놀랐으나, 이 작은 교회에서 아펜젤러 선교사가 조선에 복음의 씨를 뿌려 오늘의 열매를 거두었다니 더욱 놀라웠다고 했다. 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얼굴이 전도지이고, 우리 자신의 말이 그리스도의 편지이고, 우리 자신의 삶이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 거룩해져서 우리가 움직이는 교회가 된다면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하고 확신을 갖게 되었다면서 격려를 마쳤다.

기조연설에 나선 이종전 교수(인천기독교역사문화연구원 원장/어진내교회)는 하나님이 한국을 특별히 사랑해서 아펜젤러, 언더우드가 조선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중국을 선교하러 온 선교사들을 통해 한국에 선교의 씨를 뿌려 성경까지 미리 만들어 놓았다. 참 감사한 일이다라고 했다. 또한 인천은 개항하기 전 아주 작은 어촌 마을에 불과했는데, 개항한 후 오늘날, 배와 비행기가 드나드는 국가의 관문 300만 도시가 되었다. 한국 복음의 출발점이었던 인천이 이러한 복과 사명을 받았으니, 앞으로도 사명에 앞장서자고 했다. 또한 두 명의 발제자, 한 명의 논찬자를 소개와 진행을 말하며 기조연설을 마쳤다.

발제1 – 초기 내한 선교사들의 선교 사상과 그 특징 – 소요한 교수(감리교신학대학교 교회사)
개항과 더불어 초기 선교사들이 한국에 끼친 영향이 지대했기 때문에 일반 사학도 초기 선교사들에 대한 입장이 있는데, 미국 선교사들을 서구열강의 침략과 함께 살펴보는 시각이다. 류대영의 ‘초기미국선교사 연구1884-1910’에 기반한 시각으로 △1. 초기 미국의 선교사들의 생활방식과 습성은 미국의 전형적인 중산층의 것이라는 한다. △2. 초기 한국에 파송된 미국 선교사들은 등에 업은 미국 문명은 한국인을 차별하며 선교를 진행했다는 주장이다. △3. 이러한 관점은 선교에 대한 일방적인 관점으로 선교사들의 선교 방법을 제국주의적 성향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반해 교회사학의 입장은 △1. 미국 선교사들이 일방적으로 선교할 만큼 선교사들이 힘이 있었으며, 조선 사회에서의 선교가 마치 조선 민중이 힘에 종속되어 눌리는 것처럼 강제로 선교 되었겠는가? 하는 문제이다. 대표적으로 영아(嬰兒)소동(서양 선교사들이 조선의 갓난아이를 납치해서 약을 만들고, 깡통 분유를 모르는 조선인들은 서양 선교사가 조선 여자를 납치해서 유방을 잘라다가 흰 우유를 만들어 마신다고 소문내고 고아원으로 쳐들어온 사건)의 경우를 들 수 있다. 당시 서양의 발달된 문명은 이제 막 개화되는 조선 사람들에게 호기심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이질감과 반감의 대상이기도 했는데, 선교사와 조선 사역자들 사이에도 이러한 이질감과 긴장이 존재했음을 볼 수 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복음을 통해 조선에 가져온 것은 모든 사람이 인종, 계급, 연령, 종파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고 나누는 평등과 국민 주권의 개념이다. 이들 선교사로 말미암아 조선인들은 이 땅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자유인으로서의 존재를 자각하고 깨어났다. 물로 여성들도 교육과 의료를 통해 남자에게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지음받은 존재로 자각하기 시작했다. △3. 또한 초기 선교사들은 선교에서 각 교파와 교단들이 경쟁이 아니라 서로 대화하고 합력하고 연합했음을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한다. △4. 아펜젤러는 구원의 체험과 감격, 신앙의 결단을 내리면서 신학을 했다. 이러한 신앙 배경으로 아펜젤러가 해결하고자 했던 문제는 인간의 가장 깊은 죽음의 문제, 구원의 문제를 복음으로 답을 할 수 있다는 확신에 있었고, 이러한 믿음으로 현지인들을 교육하고자 했다. 언더우드 역사 이와 비슷한 신앙과 사상으로 함께 초기 선교지 사역을 협력했다.

발제2 – 한국 선교 140주년과 해방 이전 인천 기독교의 역사적 의미 – 이은선 교수(안양대 명예교수/백석대 초빙교수)
강화도조약에서 부산, 원산, 제물포의 3개 항을 개항하기로 한 후, 1883년 1월 1일 인천이 개항되었다. 개항되기 전 제물포는 조그마한 어촌 마을에 불과했다. 하지만 개항되고 조계지(외국인 행정 자치 치외법권 지역 14만 평)가 형성된 후, 제물포는 서울 가까운 조선의 대외 관문이 되어 모든 출입 및 통상 조약이 이곳에서 성립되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오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제물포에 입항하는데, 25세 총각인 언더우드는 먼저 서울로 가고, 아펜젤러의 아내는 임신 중이라서 인천 초계지에 여러 날 머물게 된다. 이로 인해 인천 조계지는 임신한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 부부가 처음으로 머물며 복음의 씨를 뿌린 감리교 모태가 된다. 내리교회 홈페이지에서는 1885년 7월 29일을 “아펜젤러 선교사에 의해 내리교회 시작 – 한국의 어머니 교회 출범”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1892년 봄, 아펜젤러의 후임으로 존스 선교사가 제2대 내리교회 담임이자 제물포 선교 책임자로 부임해서 최초로 인천에 상주하는 선교사가 되었다. 아펜젤러가 선교의 터를 닦았다면, 존스는 그 터 위에 교육 사역과 복음 전파 및 하와이 이민 등의 사역을 쌓았다. △1. 존스 선교사 부부가 세운 인천의 근대 교육 – 존스 선교사 부부가 세운 영화여학당(永化如學堂)은 인천에 세운 근대 교육의 시발점이었다. 1897년 여학교를 남학교와 분리했다고 기록하니, 남녀를 같이 교육하다가 영화학교와 영화여학교로 분리된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영화초등학교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2. 인천과 강화도를 비롯한 주변 지역의 복음화 – 존스 목사는 내리교회에서 1892년부터 1903년까지 11년간 사역했는데, 그 기간에 23개 교회를 인천과 강화에 세웠다. △3. 하와이 이민 – 1901년 조선에 큰 기근이 들었다. 존스 선교사는 인천항에서 일하던 조선 노동자들과 교인들의 비참한 현실을 목도했다. 당시 전쟁과 관아의 횡포에 마음 편할 날 없던 조선과는 달리 하와이는 일만 하면 천국이었다. 그래서 존스 선교사는 이민을 모집해서 부두 노동자 20명, 배꾼과 상인 30명, 그리고 군인, 머슴, 학생 및 선비 등 121명 제1차 이민단을 구성해 1902년 11월 이민선 갤릭(S. S. Gaelic)호를 타고 첫 하와이 이민을 시작한 이래, 1905년 이민이 중단될 때까지 64회에 걸쳐 총 7,226명을 이민 보냈다. 이들은 하와이에서 1906년경 13개 예배당과 35개 전도소를 갖게 되고 일본에 대항하는 구국정신을 고취하여 신민회까지 조직하게 된다. 이 단체는 내부 갈등으로 해체되긴 했으나, 이후 안창호와 연결되어 1907년 국내에서 ‘대한신민회’ 발족으로 이어진다.

인천과 강화도 지역 기독교인들의 3.1운동 – 인천 지역에서 일어난 시위는 총 49건이다. 강화에서 가장 많은 시위가 일어났다. 1919년 3월 18일 강화에서는 길상면 온수리에서 은 세공업을 하는 기독교인 유봉진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강화군 장터에서 ‘구 한국기’를 흔들며 2만 명 이상이 참여했다. 인천에서는 시위가 가장 적게 일어났는데, 이는 강력한 경찰력의 방해 공작이 심했기 때문이고, 일본인이 조직한 자위단이 존재했으며, 학교 등 유력 기관이 지속적으로 시위를 막으려 압박했기 때문이다. 1908년에 조직된 내리엡윗청년회는 3.1운동 이후 다시 조직을 정비하여 본격적인 계몽 활동을 주도하며 청년 야학을 시작한 인천 기독 청년은 한국 근대정신의 탄생지이다.

논찬 박찬희 목사(AEU 겸임교수 교회사)는 첫 번째 발제인 소요한 교수의 ‘초기 내한 선교사의 선교 사상과 그 특징’에 관하여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선교사로 헌신하게 된 동기, 미국에서의 선교사 운동이 발생과 영향을 좀 더 구체적으로 첨언하였으면 하고 아쉬움을 표했다. 또 아펜젤러와 언더우드의 방대하고 서로 중첩되는 선교 업적은 좀더 명확하게 분리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두 번째 발제인 이은선 교수의 ‘한국 선교 140주년과 해방 이전 인천 기독교의 역사적 의미’는 인천 선교 140주년을 군더더기 없이 아주 잘 요약한 교과서라고 칭찬하며 발제에 나선 두 교수에게 감사하며 논찬을 마쳤다.
■ ■ ■ 이하 관계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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